왜 음주 블로거는 겸손해지는가

나도 비슷한 글을 쓴 적이 있지만 "뛰어난 개발자는 게으르다"는 얘기는 지겨울 만큼 자주 등장하는, 그만큼 개발자의 특징을 잘 설명해주는 반어적인 표현이다. 성실하지만 일 못하는 개발자. 게으르지만 일을 잘하는 개발자. 뭐 그런 뻔한 얘기. 그래도 매번 재밌다.

오늘 발견한 Why Good Programmers Are Lazy and Dumb도 역시 비슷한 얘기다. 흥미로운 것은 단지 게으르다는 것 말고 "멍청하다(dumb)”는 것도 뛰어난 개발자의 조건에 포함시켰다는 사실이다. 멍청한 것이 어떻게 뛰어난 개발자의 조건이 될 수 있을까. 그것은 반대로 생각해보면 된다. 똑똑한 개발자가 있다고 하자. 그러면 그는 자신이 똑똑하다는 것을 잘 안다. 따라서 더 이상 배울려고 하지 않고 자신이 한 작업에 대해서 비판적이지 않을 것이다. 똑똑한 자기가 머리 속에서 척척 문제를 풀어서 한번에 쫙 완벽하게 만들었으니 더 고민할 것도, 더 다듬고 발전시키려고 할 이유도 없다는 얘기다. 반면에 멍청한 개발자는 뭔가 더 나은 방법이 없는가 자꾸 고민하고 공부하게 되고, 자신이 만든 코드에서 자꾸 한심한 점을 찾게 되니 계속 개선하고 다듬으려는 노력을 기울이게 된다는 것이다. 역시 반어적인 표현이다. 여기서 말하는 멍청한 개발자라는 것은 사실은 매우 현명한 개발자일 것이다. 정말 멍청한 개발자는 대충 돌아가면 만족하고 말테니까.

게으르다는 것, 멍청하다는 것은 사실은 뭔가 더 나아지려는 변화를 요구하는 동력이다. 현재에 만족하지 않고, 자신이 알고 있고 익숙한 것에 안주하지 않는 지혜로운 사람의 특징이다. 누구에게서 무슨 얘기를 들어도 "저건 뻔한 얘기다. 다 안다"라고 하는 사람과 "이런 얘기에서 내가 배울 수 있는 것은 무엇일까"를 진지하게 생각해보는 사람의 미래는 크게 다를 것이다. 뛰어난 강사는 자신이 가르치고 발표를 하면서도 청중들의 반응에서 무엇인가를 배운다. 반면에 한심한 사람은 대단한 이야기를 들어도 자신이 아는 비슷한, 사실은 그 수준과 핵심가치는 다른 무엇에다가 자꾸 들어맞추고는 "다 아는 얘기네"라고 무시한다. 생각해보면 나도 그런 사람이었던 것 같다. 세미나나 강의를 들어도 지루해 하기만 하고, 그 중에서 틀린 부분만 집어내려고 했던 때가 있었다. 생각해보면 가장 발전이 더딘, 그저 주위에서 좀 잘한다 치켜주니까 세상 넓은 것 모르고 자만하던 때였던 것 같다. 대체로 젊었을 때 뭔가 뛰어난 결과를 낸 경험이 있는 사람들이 이런 함정에 잘 빠지는 경향이 있다.

언제부터인가 그러지 않으려고 노력을 하다보니 어떤 사람에게서도 배울 점이 있고, 도움이 되는 부분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물론 아무런 가치는 주지 못하면서 신나게 비난만 하는 사람들에게서는 "저렇게 살지는 말자"라는 것 외에는 배울게 없긴하지만.

 

아무튼 저 글을 보다가.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자신을 발전시켜주는 것이 "현실에 만족하지 못하고, 성실한 것으로 때우기에는 도저히 용납이 안되는 게으름"이라면, 자신을 겸손하게 만들어주는 것은 무엇일까? 그건 아마도 실수인 것 같다. 실패를 해보고, 실수를 하고 때론 좌절을 겪어보지 않으면 사람은 쉽게 겸손해지지 않는 것 같다.

그런면에서 종종 술에 잔뜩 취해서 들어와서 속 마음을 못 감추고 내키는 대로 글을 쓰는 음주 블로깅을 즐기다가 몇번 호되게 깨지고 나서 정신차리고는 점차 겸손해져가는 Y군을 지켜보는 것은 재밌다. 자신의 블로그를 "반성문"이라고 소개할만큼 성숙해가는 것 같다.

 

근데 게으르지만 일 잘하는 개발자라는 패러독스를 이해하지 못하는 게 현실인 듯 싶다. 무엇보다도 "칼퇴근 하지만 일 잘하는 개발자. 월화수목금금금에 야근은 잘 하지만 일 못하는 개발자"를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으니 말이다.

12 Comments

영회October 26th, 2009 at 4:58 pm

제목을 보니까 밑도 끝도 없이 이런 문구가 생각나네

“왜 배고픈 블로거는 까칠해지는가”

MichOctober 26th, 2009 at 7:37 pm

영회씨, 전 영회시 코멘트를 보자마자, 밑도 끝도 없이 “왜 배고플때 운전하면 과속을 하는 걸까” 라는 생각을 하게 되네요 ^^

그건 그렇고,
난 평소엔 내가 게으르다고 생각하다가도 프로그램만 시작하면 부지런해지는 느낌이 들고
또 평소엔 퍽이나 멍청하게 생각되다가도 프로그램만 시작하면 똑똑해진 것같은 착각이 들거던…
완전 자격 미달이넹…

KevinOctober 26th, 2009 at 10:25 pm

Stay Hungry. Stay Foolish.

영회October 27th, 2009 at 1:03 am

Mich/ 앗.. 형수님, 평화 열 때문에 마음 고생 좀 하셨겠네요. 아프면서 큰다고 하니 한 동안 무탈하게 지내겠죠.

Toby/ 그나저나 댓글 올리면 여긴 괴물로 나오네. 이쁜 걸로 좀 바꿔줘

C-ThinkerOctober 27th, 2009 at 3:24 am

계속 개선하려는 노력을 보이는 것이 똑똑한 개발자라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사실 멍청한 개발자는 자신이 뭘 모르는지, 뭐가 잘못 되었는지, 왜 맨날 똑같은 삽질을 하는지도 모르는 개발자 아닐까요. 하지만 말씀하신 내용은 100% 공감합니다.

TobyOctober 27th, 2009 at 9:42 am

Mich/ 어제 집에 오면서 좀 밟았구나!
영회/ en.gravatar.com 가서 사진 등록하면 괴물로 안나와
Kevin/ 배가 고파요..
C-Thinker/ 자신은 정말 잘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더 이상의 노력을 안하는 사람도 있는 것 같습니다.

KevinOctober 28th, 2009 at 10:53 pm

저도 항상 배가 고픕니다… @_@;;;
근데 이게 알고보니 일종의 직업병…까지는 아니지만, 아무튼 하는 일과 관련이…
http://arstechnica.com/old/content/2008/09/study-heavy-mental-effort-leads-to-much-bigger-meals.ars

김현남November 2nd, 2009 at 4:02 pm

안영회씨가 음주블로거였군요. ^^

TobyNovember 2nd, 2009 at 5:25 pm

김현남/ 앗! 실명을 밝히시면 어째요…
이미 다들 아는 걸까요? :)

김현남November 3rd, 2009 at 11:45 am

Y군, 반성문
저만 아는 것은 아니겠죠? 저만 아는 거라면 -.-

임성현November 4th, 2009 at 10:02 pm

내용 잘 봤습니다.
공감합니다.

근데.. 저는 제 소스가 반성문이 되어갑니다.
^^
오랜만에 형 블로그에 왔으니
이런글 저런글 구경하고 갈께요.
안녕.

영회November 5th, 2009 at 1:45 am

다양한 괴물 가운데 선글라스 낀 낯익은… 사람인가 괴물(?)인가 껴 있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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