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지는 yes24)

내가 처음 프로그래밍에 빠지게 된 건 국민학교 5학년 때 친구집에 놀러갔다가, 당시 SPC-1000 홍보용으로 삼성전자가 뿌려대던 컴퓨터 소개 만화책을 발견하고서부터이다. 책 내용은 CPU가 어떻게 동작하고 RAM은 뭐하는 놈이고 주변기기가 어떻고 하는 내용이었다. 그런데 뒤로 가면 BASIC이라는 놈을 이용해서 두 개의 정수를 입력 받아서 더하기 문제를 내고, 답을 넣으면 맞았는지 틀렸는지를 알려주는 간단한 프로그램을 작성하는 방법이 나와있었다. 10 INPUT A. 뭐 이렇게 시작하는. 프로그램이라는 것을 만들면 컴퓨터가 내가 원하는 대로 움직여준다는 것이 마냥 신기했다. 그리고 그 책을 빌려와서 한 100번쯤 읽은 뒤 나도 제대로 프로그래밍을 배워고보 싶다는 생각을 했고 세운상가와 동네 PC매장, 교보문고 종로 출입구 바로 옆에 있던 컴퓨터 섹션을 싸돌아 다니며 코드가 나와있는 책을 구해서 공부하다가… 결국 이 모냥이 됐다. 아무튼 그때 친구네 집 방구석에서 굴러다니던 그 책을 만나지 않았다면 나도 대부분의 친구들 처럼 막연히 컴퓨터=게임기라고 생각하며 컸을지도 모르겠다.

며칠 전에는 트위터를 뒤지다가 인사이트 출판사에서 파이썬 어쩌고 책을 ebook으로 낸다는 얘기를 발견했다. (남이 만든) 소프트웨어와 (남이 쓴) 이북에는 돈을 쓰는게 아니라는 신념을 가진 개발자가 적지 않을텐데 특정 기기 전용도 아니고, DRM도 없는, 친구나 동료와 살며시 돌려보거나, 토런트 사이트에 올라가기 딱 좋은 PDF 포맷으로 프로그래밍 책이 나온다는 것이 놀랍기도 하고 한편으로 걱정이 들기도 했다.

출판사의 이런 시도가 "역시나"로 끝나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이 들어서 나도 이북을 바로 구입했다. 사실 파이썬에는 별 관심이 없다. 파이썬은 97년에 C++보다 10배 생산성이 좋다는 홍보성 글에 넘어가 공부하고, 업무에 적용했다가 프로젝트를 말아먹을 뻔한 경험이 있다. 그 뒤로 정 떼고 있었는데 몇년 전에, 지금은 홍공과기대 교수로 있는 성훈이가 같이 관여했던 프로젝트의 CMS로 Plone을 쓰자고 우겨서 얼떨결에 설치했다가, 툭하면 쏟아져 나오는 괴상한 파이썬 에러메시지와 씨름했던 악몽도 있다. 레딧 같은 커뮤니티를 돌아다니면 파이썬 좀 한다고 다른 언어(주로 자바와 php) 사용자를 무시하고 낄낄거리며 놀려대는 저질 오덕들도 많이 만난 탓에 갈수록 정 떨어지는 언어였다. 그런데 생각지 않았던 이북을 구입한 탓에 다시 파이썬을 공부해봐야 할 것 같다. 까짓거 잡아 먹히기야 하겠어.

홍보용 만화책을 우연히 만난 덕에 프로그래밍의 재미에 빠졌던 것처럼 이 책과의 만남이 생각지 않았던 또 다른 재미에 빠지게 해줄지도 모르겠다.

참, 이걸 공부하면 스프링 파이썬(http://springpython.webfactional.com/)을 써볼 수도 있겠구나.

아무튼 읽기 시작.

앞으로 한글로 된 프로그래밍 이북이 많이 나오기를 바라는 마음이 있다면 여기가서 한 권씩 사보기를.

재성이가 보내준 자빌메(자바 세상의 빌드를 이끄는 메이븐)을 두번째 읽기 시작했다.

이 책을 처음 읽은 것은 몇 주 전이다. 책을 받은 날 저녁, 반가운 마음에 바로 읽기 시작해서 그날 밤 잠자리에 들기 전에 끝냈다. 책의 내용은 내가 이미 다 알고 있는 것들이라 친숙한데다, 블로그 글을 읽는 듯한 느낌이 들정도로 흥미롭고 편안하게 쓰여져서인지 술술 잘 읽혔다. KSUG 운영진의 한 명인 benelog님은 한 시간 반만에 이 책을 다 읽어다고 하니 메이븐을 이용한 개발과 경험이 있는 사람이라면 그리 어렵지 않게 끝낼 수 있는 책인게 분명하다.

꽤 오래전부터 책을 읽고 서평을 쓰거나 감상을 적는 일은 삼가해 오고 있다. 여러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가볍고 진지하지 못한 인상비평을 수준의 글을 공개된 매체에 남겨서 다른 이들에게 어떤 방향으로든 오해를 주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누군가는 소중한 가치를 얻을 수 있는 책을 꼼꼼히 읽고 고민하지도 않은 주제에 몇 가지 트집을 잡고 빈정대서 책을 제대로 접할 기회조차 박탈시켜 버리거나, 성의 없는 두리뭉실 칭찬으로 자신이 필요로 하지도 않은 책을 읽게 만들어서 바쁜 개발자들의 시간을 낭비하게 만들고 싶지 않았다. 책 읽고 감상 남기는게 뭐 그리 대수라고 깐깐하게 생각하는가 싶겠지만, 내가 스스로 책을 쓰는 데 적지 않은 인생을 소비해보니 그 창작의 수고에 대해 어떤 면으로든 갖춰야 할 예의가 있다는 생각이 절실히 들었던 것 같다.

혹은 남의 책 잘못 깠다가, 나중에 내 책이 역공을 당해 판매가 저조해지면 출판사에 불려가 혼날까봐 겁이 났던 것도 있다. 자기 생각을 F워드를 섞어가며 거침없이 쏟아내던 개빈 킹 조차, VC로부터 거액의 투자를 받고난 뒤  회사의 이미지에 나쁜 영향을 주는 직원의 말과 행동에 강력한 제제가 가해지던 JBoss에 입사하고는 예의바르고 순한 범생처럼 변해간 것과 비슷할지도 모르겠다.

그러던 중에 재성이가 자기가 쓴 "책을 보낼테니 주소를 알려달라"고 연락이 왔다. 앗싸를 외치고는, 메신저로 주소를 적어주고 있었는데, 뒤 따르는 말이 "책에 대한 냉정한 평가를 해줘"였다. "에이, 우리 사이에 어찌 그런 짓을…"이라고 넘기려는데, "그럼 안 보내줄거야"라는 협박이 돌아왔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책을 읽고 감상을 공개하기로 약속했고, 지금 다시 내 느낌과 생각을 정리하기 위해서 책을 읽고 있다.

 

내 스타일이 원래 그러니, 한번 시작하면 얘기가 길어질 지도 모른다. 그래서 결론부터 얘기하고 가야겠다.

이 책은 메이븐의 도입/사용을 진지하게 고려하고 있는 사람이라면 반드시 읽어야 할 책이다. 메이븐에 관한 책이 영어나 한글로 여러 권이 이미 나와있고, 인터넷에도 많은 자료가 존재한다. 하지만 이 책, 자.빌.메.는 다른 책과 다르다. 다른 모든 책보다 낫다고 쉽게 말할 수는 없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다른 책과 차별될만한 요소를 가진 독특한 책이다. 그 점이 매력이고, 장점이다. 물론 그것이 어떤 독자에게는 단점될 수도 있겠지만. (재성이는 내 책의 리뷰를 쓰면 스프링 개발 경험을 몇년 쌓은 뒤에나 보라고 할거라고 했는데, 나는 재성이와 달리 까칠하지 않고 착하기 때문에 "빌드 경험 몇년 쌓고 난 뒤에 이 책을 보라"고 하지는 않을 거다. 삽질 경험을 쌓고 나면 더 얻을 수 있는 가치게 있겠지만, 일단 이해는 안되도 책을 읽으며 이런 것이 있구나 하고 기억만 해둬도 큰 도움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결론 끝.

참, 노안이 시작되기 시작한, 또는 안구건조증이나 기타 질병으로 눈이 침침한 분들은 절대로 흐릿한 실내 조명 아래서 이 책을 읽지 말기 바란다. 책의 인쇄상태는 가장 큰 단점이다. 특히 명령창에 나온 메이븐 실행화면은 뭉개지고 흐릿해서 아주 밝은 조명아래가 아닌 곳에서 읽으려면 눈이 충혈되고 아파올 수 있다. 나도 한밤중에 스탠드 불빛 아래서 책을 다 읽느라고, 눈이 빠지는 줄 알았다. 그마나 메이븐 실행 결과 내용에 익숙해서 대충 보고 넘어가서 그렇지, 명령창의 내용을 자세히 읽으려면 눈에 힘주다 짜증나서 책을 덮어버렸을 지도 모른다. 다음 인쇄에서는 개선되기를 가장 바라는 부분이다. 이 문제는 출판사의 실책이 아닌가 싶다. 물론 시력이 1.2이상 되고, 명암 구분에 뛰어나며, 눈에 총기가 도는 젊은 분들이라면 괜찮을지도 모르겠지만.

 

다음 할 얘기는 "이 책이 말하는 빌드란 도대체 무엇인가? 메이븐이 과연 빌드툴인가?" 이다. 처음부터 시비를 걸고싶지는 않지만, 어쨌든 책이 다루는 주제의 정체와 책이 사용하는 용어에 대해 언급하지 않고 시작할 수는 없기에, 이 책이 빌드라는 개념에 대해서 두리뭉실 넘어가고, 일관성 없이 쓴 것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겠다. 이 얘기는 다음 편에서 계속.

© 2017 Toby's Epril Suffusion theme by Sayontan Sinh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