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래 숫기가 없고 극도로 내성적인 성격을 가진 나는 처음 보는 사람들을 만나서 이야기를 나누고 관계를 형성한다는 네트워킹이란 정말 나와는 관련 없는 다른 세상 얘기라고 생각했다. 내가 좋아하는 건 조용히 관찰하는 것이고, 그래서 새로운 사람들을 만나는 모임에선 항상 사람들의 모습을 유심히 관찰을 하다가 조용히 사라지곤 했다.
그런 내가 네트워킹에 흥미를 가지게 된 건 90년 대 후반부터 열심히 참석하던 개발자 행사, 특히 해외에서 열리는 컨퍼런스 때문이다. 보통 3-4일 일정으로 열리는 컨퍼런스에선 매일 저녁 스폰서가 주최하는 네트워킹 파티가 진행된다. 행사가 열리는 호텔이나 전시장에서 하는 경우도 있지만 근처의 유명 펍이나 식당을 통째로 대여해서 열리기도 한다. 음식과 음악 정도 제공되는 공간에 다들 서서 돌아다니면서 곳곳에서 몇 명씩 모여서 이야기를 한다. 종일 어려운 기술 발표를 듣고 토론하고 했던 사람들이 또 무슨 할 얘기가 그렇게 많은지 열심히 이야기를 나눈다. 한동안 그러다, 또 흩어져서 다른 그룹에 들어가거나 마음이 맞는 상대가 있으면 바닥에 앉아서 1:1로 진지한 이야기를 이어가기도 한다.
나는 이미 그룹이 형성되어있으면 슬쩍 끼어들어서 무슨 얘기를 하나 듣기만 했다. 별별 얘기들이 오간다. 자기소개 그런 것도 없이 대뜸 누가 흥미로운 주제의 이야기를 시작하면 돌아가면서 자기 생각을 편하게 얘기하다 흩어진다. 한국이었다면 일단 모이면 명함부터 돌릴 텐데 서양 애들은 세일즈 쪽이 아니면 명함 따위를 가지고 다닐 리가 없지. 아무튼 그렇게 새로운 사람을 만나고 새로운 이야기를 듣고 자기 생각을 나누는 시간도 있지만, 자신이 어떤 일을 하고 어떤 이유로 행사에 참석했는지 앞으로 어떤 구상을 하고 있는지, 자신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기도 한다. 엄청난 속도로 기술 토론을 할 때는 엄두를 못 내던 나도 그런 분위기에서 조금씩 이야기를 꺼낸다. 내가 최근에 참석한 해외 컨퍼런스는 스페인에서 열린 유럽 개발자 행사인 Spring I/O였는데 그때까지도 참석자 중 동양계는 극소수였다. 일본에서 참석한 사람이 가끔 보이고, 어쩌다 한국의 대기업에서 오신 분들이 있긴 하지만. 어쨌든 소수였기 때문에 말을 꺼내기 시작하면 다들 흥미롭게 들어준다. 한국인이라고 했지만 알고 보니 호주에 산다고 하면 더더욱. 참석했던 행사 대부분이 미국이나 유럽에서 열리는 것이라 호주에서 간 사람들도 극히 드물었으니까.
얘기를 나누다 다음을 기약하기도 했는데, 특히 일본이나 동양에서 온 소수의 참석자들과는 뭔가 정이 들기도 하고 그랬는지, 앞으로 한국-일본 개발자들이 모여서 우리만의 컨퍼런스를 만들어보자고 의기투합도 해보고 서로 연락처도 주고받고 그랬던 것 같다. 비즈니스 네트워킹이라고 하기에는 다들 기술에만 관심 있는 너드 같은 사람들이어서 그랬는지, 온라인 커뮤니티 등에서 얼마든지 교류할 수 있어서 그랬는지 모르겠지만 행사 이후 만났던 사람들과 관계가 이어진 경우는 별로 없어 보였다. 특히 멀리서 참석한 나 같은 경우엔.
그러던 중에 호주에서 SME(Small and Medium-sized Enterprises) 경영진들을 대상으로 세미나가 열린다고 호기심에 한번 참석을 했다. 마지막 시간 발표 주제가 비즈니스 네트워킹이었다. 네트워킹이 왜 중요한지 어떻게 해야하는지 열정적으로 설명하던 발표자가 이제 실습을 해봅시다라고 하고는, 옆에 앉는 사람들과 네트워킹 연습을 시켰다. 워낙 오래전이라 행사 이름이나 다른 발표 내용은 기억이 나지 않지만 그때 한 네트워킹 실습은 오래 기억에 남았다.
옆자리에 정장을 하고 온 나이가 지긋한 분과 자기소개를 하고, 행사 때 들은 이야기 중에서 서로 관심이 있을만한 주제를 골라서 각자 하고 있는 비즈니스의 예를 들어가면서 대화를 나눴다. 강사가 요구했던 것은 공통의 관심사를 찾아보라는 것이었다. 그걸 주제로 조금 더 깊이 얘기를 해보고 세미나에서 배운 걸 앞으로 어떻게 적용해 볼지 구상도 나누게 했다. 그러고 나서 괜찮다면 서로 이메일을 교환하라고 했다. 그땐 아직 소셜미디어가 활성화되기 전이라 소통 방식은 전화 아니면 이메일일 텐데, 행사에서 만나서 네트워킹을 한 사람과 만든 연결점을 확대할 수 있는 방법으로 이메일을 보내는 걸 추천했다.
방법은 이렇다. 나와 공통적인 관심사를 가진 사람을 만나서 이야기를 나누었다면 메일 주소를 정중하게 요청한다. 그리고 일주일 이내에 메일을 보낸다. 지난 번 행사에서 만나서 어떤 주제로 얘기를 나눴던 사람입니다라고 자신을 소개한다. 어차피 명함을 주고받은 것도 아니고, 시간이 조금 지나면 이름도 까먹겠지만 서로 관심 있는 주제를 가지고 이야기를 나눴던 사람이라고 소개한다면 기억을 떠 올 릴 수 있다. 그때 무슨 얘기를 했던 사람이라고 좀 더 구체적이고 특징적인 언급을 해도 좋다. 그리고 행사 이후에 자신은 어떻게 해보고 있고 또 생각은 어떻게 발전했는지 등을 가볍게 나누고 상대는 어떤지 질문을 가볍게 해 본다. 행사나 모임 등을 통해서 만드는 네트워킹은 상대의 기억에 들어가는 게 중요하다. 아, 그때 이런 말을 했던 사람, 이런 고민이 있다고 꺼냈던 사람, 내가 관심 있어 하는 주제에 대해서 흥미를 보이고 깊이 생각해봤다고 느꼈던 사람, 아니면 뭔가 재밌는 말을 했거나 튀는 옷을 입었다거나, 뭐가 됐든 상대의 기억 속에 단기적으로라도 남을 수 있다면 시작할 수 있다.
메일로 서로의 소식과 관심을 나누고 나서 더 관계를 발전시키고 싶다면 이제 가볍게 티타임을 가지자고 요청을 해도 된다. 그렇게 네트워킹을 통해 시작된 연결이 단단해지다, 잘하면 비즈니스 관계로도 발전시킬 수 있다, 뭐 대충 그런 이야기였다. 나도 그때 만났던 분에게 메일을 보냈고 답장을 받았다. 워낙 다른 섹터에 있는 분이라 그 이후에 더 관계를 발전시키지는 못했지만.
지난 8월에 열린 인프콘이라는 행사엔 1800명 정도 개발자들이 참석했다. 다들 열정적이고 기술과 사람에 관해서 관심이 많은 듯 보였다. 나는 발표자로 참석했다. 발표자는 별도의 공간에서 안락하게 대기하거나 쉴 수 있게 해줬지만 해외에 사는 나에게는 흔치 않은, 사람들과 접점을 만들 수도 있는 기회라고 생각되어서 줄곳 발표장 근처 로비 한쪽에 자리 잡고 있었다. 아직도 나를 기억해 주는 사람들이 있어서 많은 분들이 와서 사인을 받거나 사진을 함께 찍고 가셨다. 가끔 명함을 주고 가신 분들도 있고. 뒤에 줄 서서 기다리는 분들이 있어서 그랬는지, 더 깊은 얘기를 하기엔 내가 부담스러웠는지, 굿즈 받으러 빨리 가야 했는지 모르겠지만 가벼운 인사 이상의 대화를 나누진 못했다. 온라인 커뮤니티에서만 뵀던 몇몇 분들과 인사하고 잠시 이야기를 한 정도 외에는.
나랑 같이 사진을 찍은 분들이 꽤 많았지만 나중에라도 나에게 사진을 보내주신 분은 없었다. 내 소셜 미디어는 잘 알려져 있고, 책에 내 이메일 주소도 있으니까 얼마든 보내줄 수 있겠지만, 굳이 그럴필요가 있을까라고 생각했는지 모르겠다. 이제 이야기할 딱 한 분 빼고는.
오후 늦게 시작된 내 세션에서 열심히 발표를 마쳤고, Q&A 시간을 가져야 해서 준비된 장소로 이동했다. 많은 분들이 오셔서 질문을 하기도 하고, 사인을 받거나 사진을 찍기도 했다. 몇 분들은 자신의 명함을 주고 가셨다. 그러던 중에 어떤 분이 명함을 건네셨는데 거기에 글이 적혀있었다. 발표를 듣고 뭐라도 피드백을 하고 싶어서 급하게 가지고 있던 자신의 명함에 글을 써서 주셨다고 했다. 발표 내용에 대한 동감과 고마움을 담은 짧은 글이었는데, 이런 걸 받아본 건 처음이어서 그런지 눈에 확 들어왔다. 발표 끝나고 긴장도 풀어지고 정신도 없어서 전해주신 분이 누구였는지 기억은 전혀 나지 않았지만 명함에 글을 써서 주신 분이 있었다는 건 컨퍼런스 날에 남은 가장 강렬한 기억이 됐다.
그리고 며칠 뒤에 페북에 명함 사진과 함께 그 이야기를 올렸는데 어떤 분이 자신이 준 것이라며 댓글을 달았다. 그리고 나랑 같이 찍은 사진도 보내주셨다. 그날 나랑 사진을 찍은 많은 분들 중에 사진을 보내준 유일한 사람이다.
네트워킹은 연결되고 싶은 사람에게 자신의 기억을 남기는 것이 시작이다. 기억이 남으려면 구체적이어야 한다. 마주친 수십, 수백 명 중에서, 아 그 사람이 있었지라고 생각이 날만하게. 보통은 대화를 나누다가 관심 있는 이야기가 오고 가거나 인상적인 내용이 있으면 기억하기 쉽다. 나에게 와서 스프링 잘 쓰고 있어요, 다음 책이나 강의는 언제 나오나요,라고 질문하시면 친절하게 답변은 드리겠지만 누가 그런 질문을 했는지 기억할 수 없다. 그런데 최근 온라인 강의에서 이런 말씀을 하셨는데, 그 내용이 너무 좋아서 실무에 이런 식으로 적용을 해봤어요, 그리고 이런 효과를 얻어서 좋았습니다라고 말을 해준 분이 있다면 나도 바로 좀 더 도움이 될만한 설명을 하려고 노력했을 것이고, 어떤 분인지 한번 더 살펴보고, 그 기억이 오래 남았을 것이다.
그렇게 기억이 있다면 접점이 만들어진 것이고, 오랜 시간이 지나기 전에 그걸 강화하는 다음 스텝이 필요하다. 기억을 상기시키면서 좀 더 대화를 이어가거나 이후에 또 다른 만남의 기회를 만드는 것이겠지.
나에게 글이 적힌 명함을 주셨던 분은 내가 글을 올린 뒤에 댓글을 남기고 사진을 보내셨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 자신이 일하고 있는 스타트업에 방문해서 커피챗을 할 수 있겠냐고 물으셨다. 기억에 강하게 남은 분의 요청이니 한번 만나봐야겠다 싶어 그러겠다고 하고, 일하는 회사를 방문했다. 그분이 어떻게 개발을 하고 있는지, 어떤 고민을 하고 있는지, 비즈니스는 어떤 것인지 더 깊이 이야기를 듣게 되었다. 그리고 이야기를 듣던 중에 개발과 관련해서 몇 가지 안타까운 생각이 들었다. 주니어로만 구성된 소규모 스타트업 개발팀이 가지는 어쩔 수 없는, 하지만 개선할 수 있다면 좋을만한 상황이었다. 그래서 내가 조금 도움을 드릴 수 있는 방법이 있을지 묻고 계속 이야기를 이어나가게 됐다.
관계가 지속 되려면 상호적(mutual)이어야 한다. 일방적인 건 오래가지 못한다. 내가 도움을 주거나 알려주고 싶은 것이 있다면 나도 뭔가 받을 게 필요하다. 그게 꼭 비슷한 레벨의 지식이거나 경험 등이 아니어도 괜찮다. 관계를 통해서 진행되는 일에 대한 상세한 피드백도 좋다. 나처럼 지식을 나누는 일을 하기 좋아하는 사람에게는 피드백만큼 값진 것도 없다. 새로운 경험을 만들 수 있는 도전거리, 알고 있던 지식을 확장해보고 싶게 동기를 만들어주는 요청, 그리고 돈을 받고 일해주는 사람들에게서는 흔히 받기 어려운 고마움의 표현도 나쁘지 않다. 보람을 느낄 수 있다면 그만한 것도 없다.
이번엔 좀 독특한 경험이었지만, 아무튼 컨퍼런스와 같은 만남에서 네트워킹이 시작되어서 연결이 발전해나가는 경험은 항상 짜릿하다.
그런데. 나야 사람들에게 많이 알려져있어서 먼저 다가와주는 분들이 많고 원한다면 어떤 식으로든 네트워크를 만드는 게 가능할 것이다. 그러면 그날 온 1,800명의 사람들은? 원래부터 잘 알고 있던 지인들이 있다면 반갑게 인사하고 함께 시간을 보냈겠지만 그렇지 못한 분들이라면 어떨까 항상 아쉬움이 있다.
그런데 이번 인프콘에는 짧지만 오후에 네트워킹 시간과 장소가 제공됐다. 나도 들어갔다가 여기저기 그룹에 끌려가서 이야기를 나눴다. 시간과 장소가 주어지니 다들 잘 하시는 것 같다. 젊은 분들이라 그런가. 저녁이 되기 전에 끝나는 하루짜리 행사임에도 그런 시간이 있다는 게 정말 좋더라. 시간이 너무 짧은 게 아쉬웠지만.
이런 생각을 해봤다. 행사에 참석한 사람들 중에서 네트워킹을 원하는 사람이 있다면 보다 쉬운 방법으로 각자 자기를 소개하고 관심사를 나눌 수 있고, 그래서 접점을 만들 수 있는 도구가 있다면 어떨까. 가능하면 행사 중에 잠깐 만남을 가질 수 있는 방법이 있다면.
그러던 중에 최근 발견한 흥미로운 서비스가 하나 있다. 이름은 우모(Umoh)이다. 한국의 스타트업이 만든 서비스이다.
컨퍼런스나 세미나 같은 행사나 온/오프라인 커뮤니티에 모인 사람들이 서로 연결될 수 있는 방법을 제공하는 솔루션이다.
우모(Umoh)는 온•오프라인 커뮤니티를 연결하는 네트워킹 솔루션입니다. '사람과 사람을 더 빠르게 연결한다'는 비전 아래, 이벤트 참가자 간 효율적이고 지속적인 네트워킹을 지원하는 B2B SaaS입니다. 행사 기획부터 운영까지, 우모와 함께 성공적으로 진행해 보세요!
시작된 지 얼마 되지 않은 서비스인데 이미 국내와 미국의 상당한 행사에서 활용되고 있다고 한다. 이거 꽤나 흥미롭다. 아직은 나도 직접 사용해 본 건 아니라서 자세히는 모르겠지만, 홈페이지와 소셜 미디어에 올라온 안내와 글을 보니 이게 내가 생각해 온 네트워킹의 도구로 잘 활용될 수 있지 않을까 싶은 기대가 생겼다. 행사를 주관하는 단체에서도 그저 퍼블릭한 강의를 전달하거나 정해진 프로그램을 운용한 것으로만 끝나는 게 아쉽다면 이런 도구를 잘 활용해 봐도 좋겠다. 이런 행사의 주인공은 앞에서 발표를 하거나 주관하는 기업이 아니라 서로 연결될 가능성을 가지고 모인 참석자들이다. 그래서 이 서비스가 어떻게 발전하고 성장하는지, 사람들에게 어떤 영향을 주는지 지켜볼 생각이다.
많은 사람들이 좋은 연결점을 찾고 유익한 관계를 만들 수 있다면 조금 더 행복해지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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